커밍아웃 그 이후

잡담 2022. 3. 19. 03:57

 

 

무성애자는 LGBT에 비해서 혐오를 사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무성애자의 커밍아웃에 회의적이다.

 

나의 경우 무성애자로 정체화 한 초반에는 아무에게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달라지는 점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때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손에 꼽을 만큼 적지만 몇 차례 커밍아웃을 했다.

 

 

무성애와 유성애를 알게되면서 나의 이야기가 유성애자인 상대에게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내 생각을 말하던 정체화 전과 달리 나의 감정이나 연애에 관련된 생각에 대해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안에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이전보다 더 애써 숨겨야 하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무성애자나 무로맨틱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회성 및 사교성이 없는 편인 나로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장 친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다행히도 커밍아웃 후에도 그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날 대했다. 난 그들이 커밍아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나를 이전과 다름없는 나로 대하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중 일부는 내곁에 남아있지 않다. 나중에 전해들은 바로 그 중 한 사람은 나에 대해 '사고방식이나 생각하는 구조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혐오를 당한 것은 처음이라 나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참고로 이전에 언급했던 첫 번째 커밍아웃 상대는 아니다)

 

 

 

사실 커밍아웃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밍아웃 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었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의미 없는 커밍아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랬다. 분명 처음에는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달라진 것이라면 그저 내가 편하게 나의 무성애 및 무로맨틱 성향에 대해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내 사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커밍아웃을 했던 사실이 흐려져 어느새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가끔 친구들은 '너도 좋은 사람 만나야지' 따위의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친구들이 이전과 다름 없이 나를 대하는 것은 좋았지만... 한편으로 나의 커밍아웃은 없었던 일이 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 없이 친구들의 마음 속에서 나는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는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무성애 및 무로맨틱, 젠더퀴어에 대해 간단한 정의만을 들은 것만으로는 그들이 그 개념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흔한 색안경만 끼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무로맨틱은 감정 없는 싸이코패스' 같은 오해.)

 

 

그동안 사람들과 지내며 나도 무난하게 공감의 리액션을 해왔다. 어떠한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해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통해 학습한 바가 있기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명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을 거란 걸 안다. 그런 나를 보며 예전에는 그냥 성격이려니 스타일이려니 하고 지나쳤던 일도 커밍아웃 이후 역시 공감하지 못해서, 나와는 달라서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가만히 이성애자인 척 하고 있었다면 연애 중인 친구를 내심 부러워한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반응이 기대와 다르거나 적절하지 않아도 그런 사소한 것에 우월감을 느끼며 만족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뭐 나의 이런 생각을 '지나치게 비정상적인 사고'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커밍아웃 한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데 결국 이렇게 친구를 잃게 되었다. 어차피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어도 나를 비정상이라 여기고 혐오할 만한 친구라면 결국 언젠가 그 관계가 끝났을 테지만 그 관계의 끝이 조금은 아쉽고 무척 씁쓸하다. 물론 이미 지난 이야기이고, 지금 곁에는 커밍아웃을 할 친구가 더이상 남아 있지도 않기에 앞으로는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의 무엇이 상대로 하여금 당당하게 '지나치게 비정상'이라는 말을 내뱉게 했는가... 나의 무엇이 오랜 친구로 하여금 혐오를 입에 담도록 하였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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