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와 개념에의 접근

2016. 9. 11. 02:11

 

 

 성적지향-특히 무성애-나 젠더에 대한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 중 하나로 그와 관련된 수많은 용어들이 우리말이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무성애의 가시화를 위해 힘쓰는 이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노력은 무성애를 올바로 알리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관련된 용어의 상당수가 외국어 표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Asexual을 무성애자라고 해석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유성애자들 중에는 성애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무"성애가 아닌 "비"성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도 가끔 무성애자를 비성애자로, 무로맨틱을 비로맨틱으로 사용하는 당사자가 아닌 이들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회색무성애자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Asexual이라면 비성애자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좁은 의미의 Asexual은 무성애자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로맨틱의 경우도 마찬가지. 하지만 Asexual을 하나의 한국어 표현으로 통일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비성애자가 아닌 무성애자가 적절하다.

 

 

 용어라는 것은 현상을 정의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용어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어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사람들은 그 용어를 통해 어느 정도는 직관적으로 그 개념을 파악하게 된다. 사실상 가시화는 용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떠한 개념에 대해 그것의 의미를 이상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적절하지 않은 용어를 붙이는 것만은 피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용어에 의해 사람들이 그 개념을 오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로 몇 년 전까지는 Romantic Asexual을 직역한 "낭만적 무성애자"라는 표현이 흔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이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무렵 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표현을 사용했는데, 외국어 표현보다는 되도록이면 한국어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맨틱을 낭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낭만'이라는 한국어의 어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로맨틱의 의미-특히 무로맨틱 무성애자-를 오해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이후 로맨틱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로맨틱(romantic)에 어울리는 한국어 표현은 무엇일까? 무성애와 유성애의 개념을 알게 되었을 무렵 난 "이성애", "동성애" 등의 표현이 이미 유성애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로맨틱에 "이성+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유성애에는 "이성+성애"라는 표현을 쓴다면 좀 더 명확하게 구분될 텐데.. 하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성애"라는 표현은 "로맨틱+섹슈얼"에 대한 표현이다. 이 사실은 우리 사회가 "무성애"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않아 왔다는 걸 말해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성애'라는 표현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인 어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성성애'등의 표현을 정식으로 사용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미 굳어진 표현을 뒤늦게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용어의 지정에 필요한 것은 사전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표현과 그들에 대한 미묘한 어감의 차이 등을 고려해야 한다. (로맨틱을 낭만으로 번역하면 안 되는 것처럼.)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퀴어이면서도 자신이 속하지 않은 다른 영역의 퀴어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심지어 자신이 속하는 영역에 대해서도 무지한 경우가 꽤 많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많은 이들이 그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어떤 동성로맨틱 무성애자가 자신을 "동성연애자"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고 난 적잖이 놀랐는데, 이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romantic'을 '연애'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 마치 적절한 용어라도 되는 듯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성연애자는 물론, 'romantic orientation'을 '연애지향'으로, 'aromantic'을 '무연애자'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romantic'을 '연애'로 번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동성연애'와 '동성연애자'라는 표현은 동성애를 '사랑'이라는 '마음의 작용'이 아닌 그저 '연애'라는 가시적인 '행위'로 여기고, 그들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쾌락을 위해 동성과 애정행각을 즐기는 사람일 뿐이라는 의미를 담은 비하적인 표현이다. 또한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동성애'라는 '행위'가 마치 그들의 취향에 의한 '선택'이라는 어감을 담아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부정하는 호모포비아적인 표현으로 쓰여왔다. (어르신들 중에는 이러한 의미를 모르고 동성연애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만큼 과거에 동성연애자라는 호모포비아적 표현이 널리 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있다면 과연 스스로를 동성연애자라고 소개할 수 있을까...



 이러한 역사적인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romantic을 연애로 번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한국어의 "연애(戀愛)"라는 단어는 반드시 두 사람을 전제로 하고 상호적인 감정의 교환과 가시적인 관계에 초점을 둔 표현이다. 하지만 로맨틱 지향은 로맨틱 끌림에 대한 마음의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로 인한 2차적인 행동 패턴이 아닌 1차적인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가시적인 행동패턴으로 접근하는 순간 그것이 마치 취향의 선택인 것처럼 되어 그 당위성을 잃게 된다. 물론 이것은 로맨틱뿐 아니라 다른 정체성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연애자(無戀愛者)'라고 하면 '연애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해 '연애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무로맨틱(Aromantic)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무성애자(無性愛者)는 '성애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는데 이 표현은 꽤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무성애자(Asexual)가 '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무로맨틱(Aromantic)은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로맨틱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로 인해 연애를 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현상이며 그들이 반드시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랑=연심=연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은 다양해서 사랑이 아니어도 연애감정일 수 있고, 사랑하지 않아도 연애할 수 있으며, 연애감정이 아닌 사랑을 바탕으로 연애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그 의미가 맞지 않는다는 것과는 별개로 로맨틱지향(romantic orientation)을 연애지향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정체성이 아닌 취향의 선택이라는 어감을 주게 되어 정체성의 영역에는 매우 부적절한 표현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의 개념을 혼동하고, 무성애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시작점에는 이러한 '가시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자리잡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보이는 현상으로써 해석하여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개념의 혼동이나 몰이해가 생긴다.

 

 실제로  몇 년 전까지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다른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로맨틱무성애자(Romantic Asexual)와 회색무성애자(Gray-Asexual)를 신체적 애정행각의 실행 여부나 선호 정도에 따라 구분하여 이해하려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이 개념자체의 이해가 아닌 개념을 보이는 현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의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체중계를 가지고 키를 측정하려는 것만큼 잘못된 접근이다.

 

 

 

 "트랜스젠더가 된다."

 

 퀴어들은 이런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이 '트랜스젠더=성전환자'라는 도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용어의 무리한 한국어 해석과 보이지 않는 개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몰이해와 비뚤어진 관심이 맞물려 트랜스젠더를 겉모습에 따라 분류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다른 성별로 겉모습을 치장하는 Cross dresser[각주:1], 표면적인 성별적 특성을 바꾸었으나 성별결정수술을 완료하지 않은 Shemale/Hefemale, 성별결정 수술을 완료한 Trans woman/Trans man의 3계로 나누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는 당사자의 정체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바람직하지 못한 분류이다. (스콜리오섹슈얼[각주:2] 기준의 분류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에게 ross dresser라니.. 경악할 뿐.)

 

 그렇다면 바람직한 분류는 없을까? 위와 같이 겉모습으로 정확하게 분류하는 방법은 없지만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성별결정수술을 받을 생각이 없는 '비수술 트랜스젠더(Transgenderist)', 성별결정수술을 받을 생각이지만 아직 수술을 완료하지 않은 '수술 전 트랜스젠더(Pre-operation Transgender), 수술을 완료한 '수술 후 트랜스젠더(Post-operation Transgender)'가 그것이다.

 

 이 분류는 앞서 말한 몰이해적 시각과 달리 겉모습만으로 그들을 정의하기는 어려운 구분법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담고 있다. 난 여기에서 정체성이란 것이 이러한-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을 가시화하여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보이는 현상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은 분명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다. 특히 성정체성의 경우 많은 청소년들이 그에 대해 고민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여러 가지 개념들을 마치 공식이라도 외우듯이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는 지양해야 하는데, 그러한 태도가 자칫 개념을 왜곡하여 이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예시와 가시적인 현상들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현상들이 보이지 않는 어떠한 작용에 의해 일어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크로스 드레서(Cross dresser) : 이성의 복장을 입는 것을 즐기는 사람. 복장 뿐 아니라 그 외의 외적인 성별 표현들도 포함한다. 흔히 여장남자/남장여자로 불리며 복장도착자(Transvestite)와는 다르다. [본문으로]
  2. 스콜리오 섹슈얼/케테로 섹슈얼(Skoliosexual/Ceterosexual) : 젠더퀴어, 트랜스섹슈얼, 혹은 그러한 성별 표현을 하는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퀴어성애자. 흔히 트랜스젠더 러버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skolio의 어원은 '비뚤어진', 혹은 '퀴어' 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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