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애적 Romantic?

이야기 2013. 1. 12. 00:37

 

 

 Asexual Heteroromantic (이성을 사랑하는 무성애자).

 무성애의 사랑-연애감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romantic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적어도 한국어로 말할 때는 보다 적절한 표현이 있는데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표현이 이미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異性愛者). 일반적으로 쓰이는 그 표현은 애초에 무성애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저 표현을 무성애에 사용하고 유성애에는 이성성애자(異性性愛者)로 쓰는 게 더 알맞다고 본다. 하지만 이미 유성애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무성애는 다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그보다 여기에서 말하는 romantic이란 감정은 어떤 감정이며 어느 정도의 마음부터를 칭하는 것일까?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친구에게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냥 호감을 느끼는 거지 좋아하는 게 아니야."라고. 호감과 좋아하는 건 어떻게 다르지? 호감(好感)이 좋아하는 마음 아닌가?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친구들 좋아하듯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기도 한다.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난 친구들도 그들의 애인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난 그들이 말하는 호감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처음 느껴보는 감정임에도 내가 느끼는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친구들에 대한 마음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 내가 무성애라는 개념을 몇 년 더 일찍 알았다면 지금처럼 romantic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내가 Aromantic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무로맨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에 대해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적은 없지만 사람을 좋아해본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romantic에 관한 감정이다. 당연히 다른 류의 사랑은 느끼고 산다.)

 

 내가 조금 색다른 감정을 느꼈던 극소수의 사람은 모두 이성이었다. 그래서 난 내게 로맨틱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자면 당연히 이성로맨틱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전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언제나 생각했다.

 "사람들이 (내가 그들을 보듯이) 나를 (연애 대상인) 특정 성별로 보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어쩌다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그 성별이었던 거 아닐까?"

 "그 사람이 여자/남자라서 싫은/좋은 게 아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런 시각이 범성애의 대표적인 특징인 Gender blind라는 걸 얼마 전 우연히 깨닫게 됐다.  그러고 보면 나는 누군가를 지칭할 때 "사람"이나 "아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여자"라거나 "남자"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 그 외에도 성별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잘 쓰지 않는다. 어쩐지 이상해서..

 

 많은 무성애자들은 사람을 볼 때 여자/남자가 아닌 그냥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무성애적 입장에서는 범성로맨틱(Panromantic)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걸지도 모른다.

 나의 경우에도 어쩌다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이성이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상대의 성별을 딱히 생각하고 좋아했던 건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성별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성별을 아는 이상 성별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눈 앞에 보이는 외모를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처럼. 상대가 이성이어서 좋은 건 아니지만 성별 역시 그 사람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범성애에 관한 자료는 생각보다 찾기가 어려웠다. 잘못된 내용들도 있었고, 자료가 있다 해도 유성애적 입장과 무성애적 입장은 분명 다르니까.. 내가 처음 로맨틱에 대한 분류를 보고도 범성로맨틱에 주목하지 않았던 건, 설명이 딱히 와 닿거나 공감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건 잘못된 설명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잘못된 설명들을 보고 난 범성애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럼 범성로맨틱(Panromantic)이란 어떤 걸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범성애는 아무나 다(심지어 동물에 무생물까지) 좋아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범성애는 양성애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여러 가지 성을 좋아하는 건 다성애다.) 범성애는 성별을 의식하지 않는(Gender blind) 마음이며 그 대상은 사람에 한한다.

 만약에 살아오면서 동성만을 사랑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가 "그 남자/여자"를 사랑했던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했던 거라면 그는 동성애자가 아닌 범성애자일 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범성로맨틱(Panromantic)인지 이성로맨틱(Heteroromantic)인지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나에게 상대의 성별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사실 내 로맨틱 지향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건 사실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보다 난 나의 감정에 romantic 보다는 좀 더 어울리는 다른 표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표현이 뭔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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