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크러쉬(Crush)라는 용어는 주로 동성에 대한 감정으로서 걸크러쉬(Girl crush), 맨크러쉬(Man crush) 등의 형태로 사용되는데 많은 이들이 이것에 대해 "반한 것일 뿐, 동성애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동성에 대한 반드시 성적이지는 않은 연애감정을 부정함으로써 비퀴어-시스젠더 이성애자로 남아있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유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는 크러쉬(Crush)를 연애감정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적끌림과 로맨틱 끌림을 따로 이야기하는 무성애의 관점에서 이 크러쉬는 분명하게 로맨틱-즉 연애감정-이라고 정의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무로맨틱(Aromantic)의 크러쉬라고 불리는 스퀴쉬(Squish)도 함께 이야기한다.



※무로맨틱(Aromantic)에서 자주 언급되는 "플라토닉(Platonic)"은 친구나 가족 등에 대한 감정처럼 연애감정과 관련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애정을 말한다. 이 용어를 정신적인 연애로 알려진 "플라토닉 러브"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성적이지 않은 연애감정을 무성애에서는 "로맨틱(romantic)"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플라토닉 러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표면적으로 접근한다면 플라토닉 보다는 로맨틱이 플라토닉 러브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크러쉬와 스퀴쉬에 관한 AVENwiki의 설명>


 누군가를 향한 집착적이고 얼빠진 사랑이라고도 알려진 크러쉬(Crush)는 누군가에게 로맨틱하게 끌림으로써 생기는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정서적 욕망이다. 그것은 보통 일시적일 수 있으며 가능한 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욕망이다.


 크러쉬에는 종종 감정을 화답 받으려는 너무나 강력한 욕망이 있다. 크러쉬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에는 많은 요소가 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많은 경우 크러쉬를 느끼는 사람들이 그 감정에 의해 행동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요소이다. 크러쉬를 가질 때 느끼는 감정과 욕망은 상당히 강력하기 때문에, 현재 존재하는 어떤 관계가 손상될 가능성에 대한 크고 틀림없이 합리적인 두려움이 있다. 그 결과 이 두려움은 종종 크러쉬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막는다.


 다른 한 편, 기대의 가능성도 있다. 그 비밀스런 욕망은 행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크러쉬"는 최초의 한걸음을 내딛도록 할 것이다. 그 최소의 몸짓들(gestures)은 거대한 공상과 희망을 가져올 수 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극단적인 감정들은 종종 "그가 날 위해 문을 잡아 줬어" 혹은 "그가 나에게 문자를 보냈어!"와 같은 행동들(gestures)을 증폭시켜 지나친 감정 표현으로 간주하게 한다.



 스퀴쉬(Squish)크러쉬에 대응되는 무로맨틱의 감정이다. 스퀴쉬는 어떤 이와의 강력한 플라토닉 관계를 원하는 감정적 욕구이다. 이런 관계들은 종종 깊은 우정(deep friendships)의 형태, 퀴어플라토닉 사이(queerplatonic pairings) 그리고 가끔 동반자 관계(partnering)를 가져온다. 그 가시적인 관계는 대개 일반적인 우정보다 정서적으로 친밀하다. 스퀴쉬는 어떤 젠더에게로도 향할 수 있고,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많은 스퀴쉬를 가질 수도 있다.


 크러쉬와 스퀴쉬 사이에는 미묘한 경계선이 있다. 크러쉬와 스퀴쉬 모두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한 집요한 생각, 그 사람의 주변을 맴도는 자의식, 그와 함께 하려는 욕망, 그들과의 (반드시 성적이지는 않은)신체적 접촉에 대한 공상, 혹은 이것들의 어떤 조합을 수반할 수 있다.


 하지만 스퀴쉬는 보통 그렇지 않은 반면, 크러쉬는 때때로 관심있는 사람의 동반자(partners)를 시기하고, (키스와 같은)로맨틱한 접촉, 연애 관계(dating relationship), 혹은 결혼에 대한 욕망을 수반한다. 양쪽 경우 모두 화답받는 것에 상관없이 상대(partner)와의 사이에 감정적 애착(emotional attachment)이 형성될 수 있다.


 관계의 유형은 두 사람 사이에서 희망하는 행동들과 나누는 행동에 따라 정의된다. 로맨틱 관계-혹은 소망하는 로맨틱 관계-는 그들을 잘 알고 가까워지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플라토닉 관계-혹은 소망하는 플라토닉 관계-에 비해 흔히 더 로맨틱하거나 애정 어린 행동을 유지한다. 둘 사이의 경계선은 흔히 다른 쪽으로 변형되는 한쪽에 의해 모호해진다.



 핵심은 크러쉬와 스퀴쉬 모두 심취(infatuations)라는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크러쉬(Crush)로맨틱한 심취(romantic infatuation)이고, 스퀴쉬(Squish)플라토닉한 심취(platonic infatuation)라는 것이다.

(출처 : AVENwiki)





 난 오랫동안 로맨틱 끌림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그것을 정의하는 데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것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질문을 하는 내 입장을 헤아려볼 생각이 없었고 그저 언짢아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하는 게 좋아하는 거지.", "뭐 그런 걸 궁금해하고 그래?"


 크러쉬와 스퀴쉬에 대한 설명을 보면 로맨틱한 관계를 갈망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그것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연애감정이란 연애하고 싶은 감정 아니겠는가. 물론 가시적인 연애관계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로맨틱한 감정이 오가는 정의되지 않은 관계도 분명 로맨틱 관계일테니까. 그것을 추구한다해도 그 감정은 분명 로맨틱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연애감정이란 것이 최고의 가치이자 중심으로 여겨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것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고, 때문에 본질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직도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러쉬와 로맨틱 끌림에 관한 자료들은 로맨틱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무로맨틱과 로맨틱 끌림에 대한 설명은 http://smrti.tistory.com/35)


 스퀴쉬는 때로는 로맨틱하게 비춰질 수 있는 무로맨틱의 애착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로맨틱도 특별한 애정을 가질 수 있고, 로맨틱한 감정이 아니어도 충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감정에 있어서의 특별한 무언가가 로맨틱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연애감정으로 비춰지는 무로맨틱의 요소들이 로맨틱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비춰질까? 난 여전히 로맨틱을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고찰들로 자신에 대해 더 알게 되고,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 가치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크러쉬와 스퀴쉬에 관한 AVENwiki의 설명> 부분은 출처의 자료를 한국어로 옮겨 인용하였음.

 ⊙번역 및 검토 : Glider

 ⊙원문링크 : http://www.asexuality.org/wiki/index.php?title=Attraction#Crushes_and_Squis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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