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부정한다면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런 정체성을 가졌음을 강요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게 널리 알려진 정체성에 관한 바람직한 시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그런 성향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당연히 나를 이성애자로 생각하고 때로는 이성애적인 것을 내게 강요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그리고 이성애규범에 갇혀 자신이 소수 성향을 가진 줄도 모르거나 외면하려하는 '스스로 정체화하지 않은 소수자'들을 종종 봤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들은 퀴어포비아인 경우가 많았다.
이성애는 강요하거나 정해주는 게 당연하면서 다른 성향은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걸까? 이성애자가 아닌 이에게 이성애를 강요하는 것 역시 실례이긴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역시 내가 그들의 정체성을 확신하거나 정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양성로맨틱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그중엔 자신을 양성애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이성애자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직접 '이성애자'라고 말하진 않는다.- 그리고 (유성애를 전제하는)이성애규범에 갇혀 있거나 퀴어포비아인 경우엔 스스로를 이성애자로 정체화한다.
어느날 가벼운 퀴어포비아인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하는- 양성로맨틱으로 생각되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끌림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되는 동성친구에 대해 무성애라든가 로맨틱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그의 감정에 대한 나의 생각을 설명했다. 친구는 나의 생각에 동의하고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동성에 한하긴 하지만 그도 자신이 경험해봤기에 무성적 로맨틱의 개념과 느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순간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있어 이미 "무성애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하는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그 감정에 대한 이야기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가 동성이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성적인 감정을 자제하는 걸 수도 있다"고...
그가 정말 무성적 감정을 느끼는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난 그의 저런 시각이 참 놀라웠다. 성애를 배제한 감정을 느낀다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유성애가 당연함을 다시 한번 말하다니... 본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조차 믿을 수가 없는 걸까? 스스로 느끼면서도 무성애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유성적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그가 퀴어포비아라서 본인의 감정에 솔직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를 무성애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이미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그 때 다시 한번 그렇다는 걸 느꼈다.
사실 그는 이미 나의 무성적 성향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 그에게 무성애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나에게 '성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신도 모르는 원인에 의해 성을 기피하게된 '성애포비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성장과정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미 사람들과 잘 공감하지 못하고 가벼운 스킨쉽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에 (제대로 된)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억측을 듣기도 했다. 물론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는 내가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딱히 그 생각이 바뀐 것 같진 않았다.
이것은 무성애자임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유성애자의 입장에서 무성애는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들은 무성애를 믿지 않고, 믿는다 해도 그것을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싶어 한다. 성애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숨겨둔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를 애정결핍이나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하는 지극히 유성애자스러운 억측들. 내가 무성애자임을 말하는 순간 그들의 마음 속에서 난 말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진 불쌍한 아이가 될 지도 모른다.
내가 무성애의 개념을 알게 된 것은 사실은 유성애의 개념을 알게 된 것이었다.
내가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하는 다수의 인간들은 이렇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을 말하는 용어는 이성애자(heterosexual)가 아니었다. 바로 반성애자(demisexual)였다. 당시에 난 내가 막연히 생각하던 다수의 개념이 소수자로 분류된다니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유성애자들의 시점. 그리고 그런 자들이 다수라는 것.
하지만 이것은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던 유성애자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내가 그들의 시점을 상상할 수 없듯이 그들도 나의 시점을 상상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나의 주변인들은 나를 까다롭고 눈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긴 세월을 함께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연애도 하지 않고 이성에게 관심 없는 나를 가끔은 동성애자로 의심하기도 한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이 나를 동성애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조금은 나을까?' 어차피 이성애자들에게 동성애자든 무성애자든 오십보백보겠지만 그래도 별종이라며 입에 오르내리거나 몸과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매도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세상에 꼭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떤 성향을 가졌든 같은 성향으로 분류된다 해도 모두 다를 텐데..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조금만 인정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모두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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