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성별과 보이지 않는 성별.

 전자의 경우 그 사람이 어떤 성별을 가졌는지 쉽게 알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엔 그것을 단숨에 확인하고 확신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시스젠더(Cisgender:생물학적 성과 gender가 일치하는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Transgender)들은 성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힘든 시간을 겪는다. 당사자의 혼란을 시작으로 이후 그것을 인정받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지 못하고,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반감이 있기 때문에..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이미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진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젠더를 스스로 인식하고 정체화한다는 건 어떤 걸까? 성별을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누구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남성성(혹은 여성성)을 아는 것과 자신의 성별이 남성(혹은 여성)임을 정체화하는 것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시스젠더라면 마음속으로 언제나 '나는 남성/여성/간성이야." 하고 생각해야 할까?

 

 젠더가 남과 여, 두 가지로만 나뉜다면,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을 부정하지 않는 이는 시스젠더일 것이다. 하지만 젠더는 그 두 가지 색 사이에도 밖에도 무수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그 무수한 스펙트럼에 존재하는 젠더를 젠더퀴어(Genderqueer)라고 말한다.

 (젠더퀴어에는 에이젠더, 바이젠더, 안드로진, 팬젠더, 트라이젠더, 뉴트로이스, 젠더플루이드, 등이 있다.

 젠더퀴어에 대한 설명은 http://smrti.tistory.com/10 )

 

 

 얼마 전까지 나는 내가 당연히 시스젠더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건 딱히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주 사소한 계기가 있었다.)

 '내가 정말 시스젠더일까?'

 

 나는 내 성별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를 특정 성별로 대해왔고 나는 그런 나의 성별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고 그것이 불편하거나 싫지 않다. 좋은 점도 많고 마음에 든다.

 하지만 많은 시스젠더들이 그렇듯이(그렇겠지?) 나는 내 성별을 딱히 인식하고 정체화한 적이 없다. 그저 당연하게 정해진 성별을 지니고 살아왔을 뿐이다. 아니, 그 신체와 보여지는 성별에 적응한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서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개념을 최근에야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 성별을 정체화한다는 것에 대해.. 성별을 인식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신체가 다른 성별의 모습이라고 해도 별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자신을 딱히 다른 성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데..

 

 

 자신을 안드로진(Androgyne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고 정체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봤는데 거기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대부분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과 반대의 성별에 대한 인식이 더 높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는 트랜스섹슈얼인 사람들도 있었고, 자신을 mtf 혹은 ftm으로 인지하고 살아왔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정체성을 사색하는 계기는 모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게 "이질감(힘듦)"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스젠더이면서 이성애자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반대의 성별로 느끼는 것에 대한 이질감, 동성에게 끌림을 느끼는 것에 대한 이질감. 자신의 신체에 대한 이질감(Pre-op TG, 뉴트로이스), 등..

 

 저런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난 나의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에 대해 딱히 고민하지 않고 많은 세월을 보냈다. 나는 적어도 동성에게 끌림을 느낀 적은 없으니까...

 내가 오랫동안 나의 성별정체성(Gender Identity)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내 신체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반대의 성별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성별을 인식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의문인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성별을 인식하고 있는 건지 인식하지 않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나의 성별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게 무척 중요할만큼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보기에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나를 알고 싶은 것뿐이다. 이것은 조금 심각해지고 싶은 시스젠더의 사소한 고민인 걸까?

 사실 위에서 나열한 젠더퀴어 중 어느 쪽이라는 생각이 딱히 드는 것도 아니다.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긴 하지만 잘 모르겠다. 궁금한 것도 많지만 지금 당장 모르거나 끝내 모른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긍정적인 걸까?

 

 나는 누군가 내 성별을 묻는다면 당연히 나의 생물학적 성별을 떠올릴 것이다. 대답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나를 특정 성별이 아닌 그냥 인간으로 봐주길 바라왔다. 당연히 보이는 성별로 대하는 것엔 별 생각 없지만 누군가에게 나의 성별을 강요당하거나 강조 당하는 건 싫고, 누군가 가끔 가볍게 반대 성별인듯 대해도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성별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부르고 듣는 걸 피하고 싶다. 아마 이것 외에도 많겠지.. 나는 그래도 시스젠더인 걸까? 아니, 어쩌면 이건 그저 내가 Gender blind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젠더를 증명하거나 찾기란 분명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나는 시스젠더임을 확신할 수도 없고, 젠더퀴어임을 확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성별정체성을 자연스럽게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면 세상에는 젠더퀴어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진짜 성별정체성을 모른 채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생물학적인 성별 쪽으로 치우친 안드로진이라든가.

 

 

 자신의 특성을 아는 것과 스스로를 어떠한 용어-성소수자-로 정체화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굳이 소수자가 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정의한다 해서 자신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는 평생 모르고 지나갈 정체성을 하나 둘 찾았다. 모두 다른 성소수자와 비교했을 때 딱히 힘들지 않은 그렇게 정체화한다고 해도 손해 볼 것 없는 사치스러운 정체성들이다.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증명하기는 어려운 정체성들뿐이지만..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보다 알게 된 것이 분명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가 혼란스러워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분명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 아닐까? 세상에는 그보다 소중하지 않은 일로 고민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그저 그들과 고민거리가 조금 다른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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