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잡담 2013. 3. 26. 02:37

 

 

 가끔 외롭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무성애자임을 정체화하는 게 꺼려졌던 건 때가 되면 알아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할 것이라 믿고 있는 소중한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성소수자가 된 기분도 이상했고..

 

 하지만 내가 무성애의 존재를 알게 됨으로써 생긴 긍정적인 점도 많다. 그 중에도 가장 기뻤던 건, 내가 만나게 될(혹은 이미 만난) 누군가가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은 가져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전에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내가 커밍아웃을 생각하지 않은 건 무성애에 관한 오해나 잘못된 부정적인 편견들, 그 외 예상되는 반응들이 싫었고, 무성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설명한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나 있을지. 무성애는 생각보다 설명할 것이 많은 정체성이니까..

 난 사람들의 연애강요에 시달리거나 하지도 않기 때문에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저 친구들에게 "그러니까 난 너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무성애자라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사람들이 내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고 심지어 패배자의 변명으로 생각하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그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건, 본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공감이라는 건 꽤 중요하다. 내가 그들의 연애 이야기에 공감하고 조금은 부러워할 거라고 오해하게 놔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건 그것말고도 많으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잘 공감하지 못한다는 건 다시 말하면 나에게 공감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이론이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고 반응하는 건 분명 한계가 있고 조금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꽤 재미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진 않아도 난 의심 없이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다.

 

 

 사람들에게 말해도 달라질 게 없는 정체성, 얻는 건 없고 오히려 잃는 것만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난 커밍아웃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듣는 이의 입장에선 '그게 뭔데? 그걸 말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나에게 이런 말을 왜 하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달라질 건 없다. 나에게 인간관계가 어려운 근본적인 원인은 무성애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자아의 한 부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조차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면.. 난 죽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즐거운 인생이었다. 하지만 난 평생 외로웠다.'

 

 무성애의 경우 유성애의 입장에선 이해하기도 어렵고, 진실성을 의심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분명 존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럼 결국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그런 식의 증거조차 없는 일도 많다.

 내게 있어 asexual이라는 정체성은 다른 중요한 것들에 비하면 누군가에게 말하기 가장 쉬운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곤란해하거나 반감을 갖는다거나, 진실을 의심하거나 하면 그런 이야기는 서로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나둘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늘어나 어느새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아가는 걸까?

 누구에게도 공감을 받지 못한다는 것,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 마음속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할 수 없다는 건 정말 외로운 일이다. 친구가 있어도 언제나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껴왔던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을 뿐, 나는 언제나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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