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맨틱 외로움

잡담 2016. 5. 1. 22:25

 

 

 "차라리 에이로맨틱(Aromantic)이었으면 좋겠다."

 

 가끔, 아니 생각보다 자주 유성애자를 상대로 한 연애사건에 지친 로맨틱에이(Romantic Asexual)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에이로맨틱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로맨틱에이들의 저 말은 그저 '에이로맨틱이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겠지'라는 푸념일 뿐, 진심으로 에이로맨틱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저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저런 면에서는 연애감정이 없는 에이로맨틱이 좀 더 편하지 않을까' 하고 '암묵적으로 동의'했고, '내가 에이로맨틱이었다면 혹시 좀 더 편했을까?'하고 가볍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난 무성애자(Asexual)라는 정체성에 있어 퀘스처너였던 적이 없고, 성별정체성(Gender Identity)에 있어서는 반년정도 퀘스처닝의 시기가 있었다. 로맨틱(Romantic Orientation)의 경우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회색로맨틱(Gray-romantic)"이라는 개념을 접하고 바로 "무로맨틱(Aromantic)에 가까운 회색로맨틱"으로 정체화했다. 그렇게 정체화하고 몇 년이 지난 작년, 문득 그에 대한 의문이 생겨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때보다 분명 많은 것을 알게 됐지만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난 여전히 나를 "회색무로맨틱(Gray-aromantic)"으로 정체화한 채 머물러 있으니까... 하지만 1년 전과는 의미가 달라졌다. 난 그저 "회색(Gray)"이라는 아주 편리한 영역에 그대로 머무름으로써 정체화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니까.. 나에게 있어 로맨틱(Romantic)이라는 영역은 정체성에 관련된 어떠한 영역보다도 어렵게 느껴진다.

 

 지금 시점에서 알 수 있는 건, 이론적인 기준으로는 아마도 내가 에이로맨틱일 거라는 것과 내가 특별히 아꼈던 사람들과 관련한 고민의 근본적 원인이 내가 '로맨틱이 아닌 에이로맨틱이기 때문'이었다는 것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내가 스스로를 에이로맨틱으로 정체화할 수 없는 건, 우선 로맨틱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자신에 대해 확인하지 못한 것들도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체화하기엔 그 정체성을 아직 충분하게 납득하지 못했다. 사실 에이로맨틱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조금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나는 로맨틱에 있어 퀘스처너리(Questionary)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로맨틱에이였다면 좀 더 편했을까?"

 

 로맨틱에이이고 싶었던 적은 한순간도 없다. 사실 로맨틱에이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난 나의 감정이 이미 충분하다고 느끼니까.. 하지만 회색로맨틱으로 확실하게 정체화하고 있었던 무렵에도 난 '로맨틱에이였다면 좀 더 편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로맨틱에이들의 이야기를 더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괴로움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건 그들이 보다 대중과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괴로움은 직접 느끼기에 더 크게 다가오고, 타인의 괴로움은 방관하는 입장이기에 작게 생각된다. 무로맨틱에이든 로맨틱에이든 저마다 경험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고, 어떤 괴로움이든 절대적인 무게를 가늠해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걸 알기에 난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정도의 아픔은 가지고 살아갈 거라고...

 

 무로맨틱이 유로맨틱에 비해 편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로맨틱이 무로맨틱에 비해 편한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로맨틱에이의 마음이 유성애자 상대에게 폄하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로맨틱에이의 마음은 '언제나' 폄하당한다는 것이다. 난 그것을 평생 겪어 왔기에 그것의 무게를 알고 있다. 이것은 내가 무로맨틱이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자 스스로를 무로맨틱으로 정체화하게 된다해도 커밍아웃할 수 없는 이유이다.

 

 

 

 난 스스로를 무로맨틱이라고 정체화하지 않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러한 개념을 몰라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난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Aromantic Asexual)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인지 모를 그것을 차갑다고 느낀다. 내가 최종적으로 스스로를 회색로맨틱으로 정체화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변함없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종류가 깨끗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정에도 가족애에도 로맨틱이 조금씩은 녹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궁극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 그 로맨틱이라는 것을 내게서 찾을 수 없기에 내 마음은 이미 충분한데도 그들은 나에게서 충분히 보답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애정을 거두어 들이고 내게서 멀어진다. 나는 그들에게는 당연한 인생의 과업을 10년, 아니 5년 전에도 몰랐고 상상 또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당연하게 함께할 정도의 고독이 아닌 진정으로 '못견디게 외롭다'고 느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연애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연애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한다. 하지만 난 오히려 연애감정이 없기 때문에 더욱 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실존의 외로움을 많은 이들이 로맨틱에 감정을 쏟음으로써 달래는데 그럴 수가 없다면 무엇을 해야할까?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 걸맞게 어느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세상에 적응해 있는 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나에게 소중한 이들이 그저 내 앞에서만이라도 변함없길 바랐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도 없을 만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었다.

 

 서로를 향해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소중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른 사람을 향한 채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외로움으로 다가오는 건 나뿐인 걸까?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저 '적응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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