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중심, 로맨틱

잡담 2015. 4. 11. 01:58



 연애가 담긴 많은 허구적 이야기에는 삼각관계가 흔하게 등장한다. 삼각관계의 특성상 주인공들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조성하던 조연(흔히 악역)은 마지막에 주인공과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가끔 이야기의 작가는 그 악역을 이야기의 끝 무렵 갑자기 나타난 비중 없는 인물과 짝지어 주곤 한다.(사실은 그와 짝지어 주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 것.) 그것이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이라는 듯이... 나는 그런 식의 전개가 너무 싫었다.


 그런 식으로 대충 아무나하고 짝지어 주는 결말은 당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짧은 시간에 진행되는 정략결혼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주인공을 향해 눈살이 찌푸러질 만큼의 열정과 집착을 보이던 그 악역의 감정을 한순간에 하찮은 마음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 같았다. 난 그런 내용을 괜찮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은 그런 내용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많은 이들이 짝이 있어야만 행복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관계의 진정성과는 상관없이 대수롭지 않은 마음이라도 연애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떤 이들에게는 더 중요할까? 그런 관계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진심으로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까?



 이야기 속에는 현실에서 갖기 어려운 이상적인 관계들이 종종 등장한다.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며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버팀목이 되어 주는 편안하고 소중한 공기 같은 친구.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관계가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흔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진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충분히 이상적인 관계를 완전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걸까? 이 세상에서는 확실하게 소유를 증명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면 미완성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을 "편안하다"고 표현했을 때, 누군가는 안타깝지만 그것이 연애감정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로맨틱이 아니라고 여기며 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연애감정이 아닌 감정은 많은 이들에게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난 로맨틱 외의 이끌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친구라는 이름을 연인으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여기는 그들의 가치와 사고에 공감할 수 없다.



 난 어떠한 인간관계든 그것이 개인의 삶의 일부를 차지하는 의미 있는 관계라면 그들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소소한 대화를 하며 서로의 내면을 나눌 수 있다면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누군가와 로맨틱한 관계가 될 때 그 관계 역시 그런 우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물론 이것은 나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한 개인적인 기준일 뿐, 나의 잣대로 타인의 관계에 대한 가치를 재단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난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기준이 저기에서 크게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타인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표면적으로 소통하고, 보여지거나 증명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단순한 지인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어쩌면 이런 나의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과 태도가 어떤 이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로맨틱하게 혹은 특별하게 좋아한다고 오해하도록 하는 이유가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나를 폴리아모리스트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나의 마음을 과대평가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그들을 특별하게 사랑한 적이 없을 뿐더러 그들의 내면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적도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소중하거나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종종 나의 마음을 과소평가한다. 그리고 나의 감정을 오해했던 이들 조차도 오해가 풀리는 순간 그들에 대한 나의 마음을 과소평가한다. 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이 로맨틱하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의 마음은 물리적인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감정의 크기나 마음의 무게를 객관적으로 수치화해서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마음의 크기가 나를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나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이유로 상처 받고, 나에게 서운함을 표하고, 나로부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한다고 여긴다. 혹은 감정적으로 나에게 '졌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런 이들의 대부분은 결국 나의 삶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나의 감정이 로맨틱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 마음을 과소평가했고, 상처 받은 것이 그들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자의와는 상관없이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매정하게 버릴 수 있는 가치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여담이지만 내가 그들과의 관계에서 상처 받았다고 했을 때 어떤 이들은 내가 그들을 연애감정으로 좋아했다고 멋대로 단정짓곤 했다. 그런 걸 보면 어떤 이들에게는 영향력 있는 감정이 연애감정뿐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대부분의 헤어짐은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어느 정도 '의미 있는 관계'들이 그런 식으로 끝나는 것은 분명 충격으로 다가오고 상처가 된다. 그럴 때마다 난 알지도 못하는 유성애자들의 시점을 추측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들은 감정에 솔직했을 뿐 그들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난 상처 받았을 그들에게 어느새 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난 그들의 행동양식을 사례들을 통해 추론할 뿐, 그들의 기분이나 행동에 대한 이유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런 식의 사고는 상처를 덜어주고, 그들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게 해준다.



 내가 그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 같고, 그것을 이유로 그들은 내게 상처 주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다. 마치 연애감정-일 뿐이지만 그들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된다는 듯이.. 그들과 나의 관계는 애당초 연애관계가 아닌데 어째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까? 오히려 감정을 배신한 건 그들인데 어째서 내가 나쁘거나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나는 소수자로서 내가 소수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다수의 시점을 헤아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 소수의 시점 같은 건 헤아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가는 다수자인 그들은 내가 자신들과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결국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어하고, 만약 정말 다르다 해도 내 쪽에서 알아서 다수의 가치-그들에게는 올바르고 정상적인 가치-에 따라주길 바란다.


 내가 경험하는 이성애자들의 감정과 관련된-이성애 때문에 망쳐지는-일들을 제삼자가 듣는다면 나를 나쁘다고 이야기할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걸 안다. 분명 난 이성애와 연애중심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그들의 개념과 가치기준을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배워왔다. 그들의 감정은 나와 다르다는 것. 그러니까 유성애자는 어느 순간 성적 혹은 로맨틱 끌림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순간에 그치기도 지속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이성애자들은 다른 성적지향에 비해 상대의 화답을 좀 더 기대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습득한 이런 유성애에 대한 지식은 나에게 말 그대로 지식이며 공식과도 같다. 난 그들이 전제하는 것처럼 그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예상하고 공감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무성애자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들이 감정을 배신한 것이지만 보통은 이런 시점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이것은 나의 기준일 뿐, 무성애나 무로맨틱의 보편적인 기준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입장을 좀 더 헤아릴 수 있는 내 쪽에서 기꺼이 그들을 포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모든 것이 내 잘못으로 취급되는 것이 가끔은 불합리하고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분명 많은 이들에게는 우정을 비롯한 어떠한 감정이 연애감정으로 변하는 것이 '감정의 발전'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은 연애감정이 사라지거나 다른 감정으로 변하는 것을 '감정의 변질'이나 배신이라고 여긴다. 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이 로맨틱이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지만 나의 마음을 오해하거나 기대했던 그들에게는 마치 내가 자신들을 배신한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진실을 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 착오를 내 탓으로 돌리곤 하지만 사실 그것이 내 잘못인 건 아니다. 이성애자를 제대로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커밍아웃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날 이성애자로 오해하도록 내버려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면-그러니까 퀴어인 게 잘못이라고 한다면-어쩔 수 없지만.


 난 그들이 느낄 기분이나 감정을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자신이 상처 받았다고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의도적으로 상대를 상처 입게 하는 순간 그들의 감정이 더 이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상대의 내면을 진심으로 들여다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배제하더라도 그 정도의 연애감정을 모든 감정들을 뛰어넘는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치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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