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처음 느껴보는 특별한 그 느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친구가 가진 특유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들었다.


 '저 사람은 나와 닮았다.' (외모가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느낌은 잊지 못할 만큼 특별했지만 당시의 나에게 그는 그저 거리에서 스쳐가는 무수한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되고 가까워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 친구와 친분이 생길수록 그가 역시 특별하다는 것을 계속 확인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 친구는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친구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편한 대로 행동해도 마치 내가 행동하는 것처럼 전혀 거슬림이 없을 것 같았다. 난 그 친구가 좋았고, 그 마음을 딱히 숨기지도 표현하지도 않았는데 덕분에 그의 친구들은 우리가 연애감정으로 서로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친구에 대한 나의 감정은 봄의 따스한 햇살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연애감정이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미미한 회색지대의 로맨틱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특별했고, 더욱 가까워지고 싶었고(마음은 이미 친했지만 현실적인 친분이 별로 없었다), 평생을 친구로서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도 나와 비슷한 감정으로 나를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로맨틱한 끌림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의 감정이 로맨틱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걸까? 당시에 로맨틱한 호감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감정과는 분명히 달랐다. 감정의 종류가 어떻든 내게는 그 사람보다 그 친구가 훨씬 소중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전보다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래도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가까워졌다. 난 그 친구가 특별하다는 것을 이전부터 주변에 이야기해 왔었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 친구와 연애하기를 바랐다. 그 중 일부는 내가 연애감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주변도 나의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난 그 친구에게 내가 '인간적으로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일상적으로 표현했다. 나의 개념으로는 단순한 연애 상대가 아닌 그 사람의 내면을 포함한 인간적인 면들을 좋아한다는 것이 보다 가치 있는 마음이었기 때문에(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봐 주기를 바랐다) 그가 혹시라도 주변의 말 때문에 내가 연애감정을 가진 거라고 오해하게 되는 일은 없길 바랐다. 이성애자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상대와의 어중간한 관계를 즐기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으로 보였겠지만 난 친구로서의 그가 아주 소중했고, 친구로서의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말했다. "그 친구에게 친구로서 정말 좋아한다고 계속 말하는 것은 실례이며 잔인한 일이고, 그 친구 입장에서는 비참한 일"이라고... "어째서?"라고 묻는 내게 그는 '너를 정말 좋아하지만 이성으로서는 매력이 없다'고 수없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음... 그게 왜???'


 그 친구와 만난 후 난 오히려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그 친구와 같은 성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좀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텐데...'


 이성애자들은 상대에게 친구일 뿐 이성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것을 비참하다고 말하지만 난 그 '이성으로 느껴진다'는 느낌을 알지도 못하고 그게 왜 비참한 일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난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수많은 이성들이 애초에 나와 친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오히려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었다. 많은 이성들이 그들 취향의 외모를 가진 나라는 사람에게 그들이 원하는 이성상을 투영하려 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난 그런 상황이 오히려 비참했다. 나라는 인간 자체로는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던 것일 테니까...


 어쨌든 그는 내게 이성애자의 시각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면서 "너는 친구라고 말하지만 너희는 남녀관계이고, 너희의 만남은 남녀의 데이트이며, 한쪽에게라도 애인이 있으면 만날 수 없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그 때의 난 무성애의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나와는 다른 다수의 시점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큰 근본적인 차이라는 것을 몰랐다. 이후 난 지독한 이성애 중심주의로 무장한 주변의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들 때문에 그 친구와 더 가까워지는 것을 포기하고 한 발짝 물러서게 되었다.



 이성애자들의 시각에서 나와 그 특별한 친구와의 관계는 연애감정을 포함한 잠재적인 연애관계였고, 끝내 이루지 못하고 흐지부지 지나간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어떤 연애 사건이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성적 끌림은 물론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 그 친구와 나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라는 것이다.



 이후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그 친구도 혹시 무성애자 혹은 회색무성애자이지 않을까?'

 난 무성애 우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유성애자들이 모두 잘 맞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지만 나와 맞는 사람이 무성애자이기까지 하다면 분명 보다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성애자들이 특별한 사람을 유성애라는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 친구의 특별함을 무성애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면이 있었기에 더욱 그가 편안하고 친근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 가운데 특별하게 느껴진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그 중 그 친구는 내게 그 특별한 느낌을 처음으로 느끼게 한 사람이었다. 나는 무로맨틱 무성애자(Aromantic Asexual)는 아니지만 그들이 말하는 소울메이트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만큼 내게는 특별한 기적 같은 만남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보다 가까워지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내가 그 당시에 무성애-그리고 유성애-라는 개념을 알았더라면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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