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마음

이야기 2016. 6. 17. 01:46



 나는 많은 이들이 연애 감정을 말할 때 흔히 이야기하는 설렘이나 두근거림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독점욕 혹은 소유욕을 느껴 본 적도 없으며, 질투라는 감정도 느껴 본 적이 없다. 또한 짝사랑은 물론 사람 사이의 좋아함에 있어 일방적인 감정을 가져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은 있다.


 로맨틱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던 순간부터 이미 난 나의 감정을 로맨틱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로맨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 대해 색다르거나 특별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느낀 그 색다른 감정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플라토닉, 즉 인간적인 애정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래도 그 안에 2~3%정도는 로맨틱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평소에 느끼던 애정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난 스스로를 회색로맨틱으로 정체화했었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 대해 색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난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다. 난 그 감정을 딱히 연애 감정이라고는 정의하지 않았지만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이성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연애 감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난 그게 연애 감정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연애 감정이 대단히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에서 나는 연애 감정이 언제나 궁금했었는데, 그 당시 난 드디어 연애 감정을 느껴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친구들은 매우 환호했고 내가 그 사람과 연애할 것을 기대했다. 친구들에 대한 감정과 어딘가 다른 좋아하는 마음, 내가 그 감정을 연애 감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건 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까지 밝아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들이 말하는 연애 감정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해 갔다. 그것을 친구들도 느끼게 되면서 그들은 나의 감정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지만 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감정의 종류가 어떠하든 난 분명 그 사람을 좋아했고 나름 진심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 사람과 연애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손을 잡는 정도의 가벼운 신체접촉에 대한 욕구조차 느끼지 않았고 질투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소소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있었는데,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것이 상쇄되진 않았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또한 가까운 친구들이 그 사람보다 더 좋았고 소중했으며, 그 사람과 만나면 즐겁지만 딱히 그 사람이 자주 생각나는 건 아니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친구들은 내 감정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는데 난 그것이 왜 그런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내가 바란 것은 간단했다. 난 만났을 때 서로 기분 좋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잘 지내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라 생각했고, 좀 더 친해져서 즐거운 기분을 보다 자주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과 연인관계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싫었다. 난 그 사람이 좋았고 그 사람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예를들면 가끔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그 사람의 태생적인 로맨틱함이라든가.. 물론 나와 맞는 부분도 좋아하는 요소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거슬리는 소소한 것들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그 사람과 친해져야 했는데 그것이 참 어려웠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던 것은 그 사람이 날 인간적이면서도 로맨틱하게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의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 그 사람과 마주할 때마다 난 상대의 그 따뜻한 마음을 공유했던 것이었다. 그 사람 스스로가 마음을 확실하게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주변 사람이 모두 저절로 알게될 만큼 오랫동안 꽤 진심이었다. 그 사람은 내가 자신을 아주 좋아하는 것도 자신과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여러 감정들을 느껴보고서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돌아보았을 때, 그 감정이 내가 당시에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한 감정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분명 폄하할 수 없는 소중한 마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이들은 이것을 '얻지 못한 상대에 대한 구차한 정당화', 즉 패배자의 변명으로 여기기도 한다. 또한 그것을 변명이 아닌 진실로서 받아들인다 해도 연애 감정을 가치의 중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나의 마음을 폄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의 종류와 크기가 어떻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일반적인 연애 감정보다 훨씬 가치 있는 진심이었고, 그 사람이어서 느낄 수 있었던 단 한 번뿐인 마음이었다.


 만약 내가 느낀 그 감정을 로맨틱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좋아했다거나 특별했던 사람은 아니지만, 분명 가장 로맨틱하게 좋아한 사람일 것이다. 난 로맨틱이라는 감정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감정의 종류가 로맨틱인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내 마음의 무게가 상대의 마음의 무게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맨틱에 대해 퀘스처닝을 겪으면서 내가 경험한 여러 사람들에 대한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그 중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 바로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었다. 내가 느낀 그 감정은 로맨틱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었을까? 그 감정을 확실하게 정의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나의 로맨틱에 대한 퀘스처닝은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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