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의 수가 적지 않은 만큼 많은 유형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고 저마다 커밍아웃에 대한 생각이 다를 거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커밍아웃을 신중하고 어렵게 이야기 하고, 어떤 사람은 가볍게 일상적으로 커밍아웃을 한다. 각자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맞게 말이다.



 Glass closet(유리벽장)이라는 말이 있다.

 벽장 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그 벽장이 밖에서 들여다 보이는 유리로 된 벽장이라는 뜻으로 당사자가 커밍아웃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자신의 성향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그가 성소수자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커밍아웃한 것과 다를바 없는 걸까? 난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유리벽장 안에 있다는 건 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본인의 입으로 커밍아웃한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퀴어임을 알기 전부터 자신의 성향을 적당히 드러내며 살아왔다. 나의 성향을 숨김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쾌한 상황들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를 독신주의자라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나를 동성애자로, 그리고 때로는 트랜스젠더로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를 어느정도 아는 사람이 어디선가 무성애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면 분명 나를 떠올릴 거라 생각한다. 그런만큼 난 내가 무성애자임을 이야기했을 때 그 사실을 크게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할 사람이 분명 많을 거라 믿지만 커밍아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모두가 당연하게 알만한 사실을 굳이 커밍아웃한다는 것은 유리벽장 안의 소수자인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에게 있어 커밍아웃은 단순히 "그렇구나. 네가 퀴어라는 걸 인정한다."라는 말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해를 바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나도 그들을 이해하지는 못하니까..

 내가 생각하는 커밍아웃 상대는 적어도 그 개념을 오해하지 않고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다. 특히 자신이 보아온 세상의 틀에 갇혀 편견을 갖거나 자신의 잣대로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애써 해석하려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퀴어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내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포비아라고 말하지만 나는 편견을 갖고 보거나, 겉으로 크게 표출하지는 않지만 반감이나 공격적인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넓은 의미에서 포비아라고 생각한다.

 무성애의 특이한 점은 혐오를 사지 않고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는 것인데 나는 넓은 의미의 무성애포비아가 상당히 많다고 느낀다.


 많은 유성애자들은 무성애에 대해 아직 짝을 찾지 못한 유성애자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상대를 오랫동안 봐 온 가까운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도 자연스러울까?


 내가 유성애자들에게서 느낀 특이한 점은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사랑-성애를 포한한 로맨틱-을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자신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인 성애-성적인 감정과 행위-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표현하며 미화하는 것이 불문율인 것 같다. 그래서 난 오랜세월 유성애의 존재를 몰랐다.

 그래서 많은 유성애자들은 무성애자에게 미묘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들의 시각에서 무성애자는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성애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지만 유성애자가 다수인 사회에서 그들은 유성애가 자연스럽고 우월한 것이라 말하며 무성애를 정상이 아니라거나 그런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런 모습을 난 많이 접했다.)


 나는 표면적인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마음 속의 반감을 다른 방법으로 돌려 표출하면서 말로는 "나는 네 말을 믿는다."라거나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건 조금 괴롭다. 그런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넌 이제 무성애가 존재한다는 검증된 지식을 접했으니 네가 그동안 믿지 못하거나 왜곡해서 받아들였던 나의 마음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식으로 호소하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난 지금도 불편하지 않으니까.. 커밍아웃한다해도 좋아지는 것이 없다. 오히려 마음은 아니면서 겉으로는 더욱 이해하는 척해야 하는 상대를 보게 되는 상황이 되어서 곤란하다. 이것이 내가 유리벽장 안에서 나갈 생각이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유리벽장 안에 있다보는 가끔 커밍아웃팅 당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시 무성애자 아니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그에게 커밍아웃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하기는 싫고.. 거짓말에 서툴러서 결국 밝혀진다면 원하지 않은 커밍아웃을 하게 되는 것인데 (커밍아웃팅이라고 말하면 될까?) 솔직히 아무리 궁금해도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편견없이 상대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해도 커밍아웃을 유도하는 행동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이해못할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무성애는 가볍게 아웃팅해도 되는 호기심이 당기는 흥미로운 소재일 뿐인 걸까?


 혹여 내가 정체화하지 못한 Asexual일 가능성을 생각해서 정보제공을 한 것이라 해도 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개념을 몰라 정체화하지 못한 퀴어에게 그 개념을 말하고 퀴어임을 생각해보길 권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다. 특히 그 정체성과 관련해서 괴로워하지 않고 잘 살아가는 사람일 경우엔 더욱. 난 내가 연애에 있어 다른 이들과 많이 다른 것을 괴로워하거나 고민한 적이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커밍아웃은 "상대의 이해"가 아니다. 자신과 다른 걸 진심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을까? 애초에 인간은 자신과 전혀 다른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커밍아웃의 결과는 그동안 상대의 정체성을 모르고 했던 실수들을 더이상 하지 않는 것과 앞으로도 편견없이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이다.


 성별을 보는 눈이 없는(Gender blind) 나에게 이성애와 동성애, 양성애 등 모든 성적지향들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젠더퀴어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다수였다면 커밍아웃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아닌 이들을 퀴어라고 말하지만 성정체성으로 인간을 분류했을 때 그 수가 보다 적은 것뿐, 그들도 다수와 함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세상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자신과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혐오하거나 배척하기도 하는 세상의 시선이 조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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