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퀴어로 정체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을 마음 밖으로 꺼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첫 번째 커밍아웃은 더욱 의미있는 일이다.
Asexual, Gray-romantic, Genderless, 그리고 Genderblind.
내가 가진 이 정체성들은 "딱히 커밍아웃할 필요가 없는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난 주변인들에게 커밍아웃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에이섹슈얼이라는 개념을 접했던 그 시점부터 언젠가 꼭 그에게는 커밍아웃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나의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온 소중한 사람. 그라면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졌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는데 있어 가장 염려가 되었던 것은 '과연 나의 정체성을 알리는 것이 상대에게 어떤 느낌일까?'하는 것이었다. '저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하는 생각을 들게 하지는 않을까.. 나는 일방적인 통보식의 커밍아웃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어떤 정체성부터 말해야할까?", "혹시 '무성애'라는 걸 모르면 그걸 어디에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젠더퀴어(Genderqueer)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등의 생각들을 했다.
난 되도록이면 소중한 누군가가 무성애자일 거라는 기대는 많이 하지 않으려 한다. 인구의 1%라는 적지 않은 수지만 분명 낮은 확률이기도 하니까.. 언젠가 그도 무성애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지만 이후 그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았고, 잊어 버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가 무성애자일 것을 기대하며 커밍아웃을 한 것은 아니었고, 난 그가 젠더퀴어를 잘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에게 없거나 희박한 4가지 개념에 대해 모두 말하고 싶었다.
난 그에게 물었다.
"만약 양성애자같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숨길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 커밍아웃 하겠냐"고..
그는 "할 것 같은데.."라고 말하고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내가 무성애자인 것 같아."
내가 커밍아웃하기 전에 그쪽에서 먼저 무성애자라는 말을 해왔다. 이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는 그동안 알던 상대의 모습들에 비추어 서로가 무성애자임을 자연스럽게 인지했다. 자세히 설명하거나 호소하지 않아도 나의 이야기가, 감정의 느낌이 자연스럽게 전달이 되는 것 같았다.
따스하고 이상적인 커밍아웃에 난 소소한 행복을 느꼈지만 마지막 남은 커밍아웃을 해야했다. 바로 젠더리스.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예상대로 그는 젠더리스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생물학적 성별로서의 성별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아해했다.(나는 내 외모에 꽤 충실하다.) 그리고 '너는 그냥 너니까 그런 걸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내가 우연히 안드로진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을 때, "안드로진=남녀가 섞여있지만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라는 설명을 봤고 그에 대해 "좀 이상한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었다. 누구에게나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굳이 "나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후 우연히 친구들과 내가 성별개념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서 다시 한번 안드로진을 검색했다. 그렇게 젠더퀴어에 대해 자세히 찾아보고 나서야 그 개념들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젠더퀴어에 속하는 정체성들이 단순히 한줄로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스젠더가 당연한 남녀 이분법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많은 이들이 젠더퀴어의 개념을 한마디로 접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이상하게 느껴질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특히 남 혹은 여의 확실한 성별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젠더퀴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성별정체성 커밍아웃에 대한 반응이 무성애 커밍아웃만큼 이상적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좋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가 그의 친구와의 대화창에 나를 초대했다. 그는 친구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친구가 궁금해하는 성별 부분을 유머러스하게 넘겼다. 그에게 젠더리스의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젠더퀴어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 블로그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그에게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그 때의 바람처럼 난 소중한 이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그에게 이야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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