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 수 없는 것

이야기 2013. 1. 21. 05:06

 

 

 무성애자의 커밍아웃이 어려운 건 그 사실을 무시당하거나 진실성을 의심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넷상에서 무성애자라고 말하는 이들 중엔 딱 봐도 무성애자가 아닌 걸로 생각되는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들이 무성애자가 맞는지는 확인할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든 스스로를 성소수자로 정의하겠다는데 그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건 자신의 영역이다. 그래도 이들의 존재는 분명 무성애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을 때 그 진실성을 의심받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해서 무성애자가 진실성을 의심받지 않을까?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많은 유성애자에게 무성애의 개념은 허황된 환상 속의 이야기로 다가올 뿐이다.

 

 

 나는 커밍아웃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나의 무성애적 특성들을 생각 없이 많이 이야기해 왔다. 그것은 그런 특성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불쾌한 일들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특성은 숨긴다 해서 숨겨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면 언제나 입을 다물고 듣기만 하거나 때때로 다른 생각을 하곤 했다. 가깝지 않은 사람과는 그렇게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친한 사이인 경우에는 언제나 피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특성을 적당히 드러내는 쪽을 택했다. 물론 그들은 나를 "아직 연애에 있어 어린 유치한 아이" 혹은 "아직 진정한 사랑을 못 만난 이성애자"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난 그리 어린 나이가 아니다.)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는 마음만 먹으면 그 성향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든 양성애든 결국 일반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애와 같은 유성애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게 괴롭겠지만 충분히 숨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성애자는 그 성향을 숨길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어려울 것 같다.

 무성애라는 개념이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는 것뿐, 무성애가 동성애만큼 세상에 알려진 상태라면 많은 무성애자들이 굳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그 성향을 의심받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연애에 익숙한 로맨틱 무성애자들은 아닐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주변인들에게 말했을 때, 안타깝게도 그 사실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왜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지 조금 서글펐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내 태도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에 내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느낄 때 기준이 되는 중요한 몇 가지가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성애를 느끼지 않았고, 소유욕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열정이 없었다. (소유욕과 열정에 관한 건 개인적인 입장이다. 다른 무성애자들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들의 기준에서 나의 감정은 그저 유치한 감정, 혹은 가벼운 호감정도로 느껴진다. 애초에 성애와 소유욕을 느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들과 연애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그런 걸 느껴본 것처럼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무성애자가 그 성향을 숨길 수 없는 이유다. (동성애자들은 상대를 숨긴 채 이성애자인척 유성애에 관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숨길 수 없는 성향임에도 무성애자는 진실성을 의심받는다. 나는 이미 나의 무성애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진실성을 수도 없이 의심받아왔다. 왜냐하면 유성애자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아직 감정이 유치한 까다롭고 눈이 높은 이성애자일 뿐이다.

 

 이미 무성애적 성향을 가까운 이들이 모두 앎에도 나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엄청난 반감을 사게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 이야기들을 믿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 무성애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다. 하지만 가끔은 소중한 이들에게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고 받아들여지고 싶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진 못해도 내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적어도 그냥 믿어줬으면 좋겠다.

 

 

 

 그들이 인정해주지 않았던 내 마음이 사랑이라고는 나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마음인 건 맞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세상을 더 살아보면 그 마음에 대해 다르게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다.

 

 평생 동안 성애를 느끼지 않고, 사랑(연애감정-romantic)을 느끼지 못하거나 정서적 감정적 사랑만을 느끼는 무성애자들에게 사랑은 꽤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가볍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하지만 무성애적인 사랑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기준이 없는 만큼 감정이 크지 않으면 스스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성애에 대해 유성애자들은 흔히 "사랑을 못하다니 불쌍하다" 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유성애자들의 시각일 뿐이다. 사랑=성애가 아니다. 로맨틱이 없는 무성애자들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로맨틱을 느끼는 무성애자들은 오히려 유성애자들보다 더욱 깊은 마음의 교류를 느끼고 그들 나름의 가치 있는 사랑을 할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그에게 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게 멀지 않은 미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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