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2013. 1. 1. 03:49



 무성애가 세상에 알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접했을 때는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역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포기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공감. 어딘가에 나의 이야기에 의문을 갖거나 의심하지 않고 심지어 공감할 수도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굉장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기본적인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정말 중요하다.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덕분에 호기심에 무성애에 대해 살펴본 유성애자들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유성애자들은 이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무성애자는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 수많은 질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나의 무성애적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하던 시기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청소년기에도 겪지 않았던 사춘기가 온 것 같았다. 난 나의 정체성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게 두려웠던 이유 중 하나가 어느새 꼭 확인해야 하는 이유로 변해있었다.


 관련 정보를 열심히 찾아서 정독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미 스스로의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이해하고 지나갔던 그 단어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내가 그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은 성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 "성적(性的, sexual)".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단어들. -예를 들면 성적 끌림, 성적 매력 등.

 난 그동안 내가 그 단어들을 당연하게 사전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사실 모르기 때문에 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수많은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무성애자에 대해 설명하는 어떤 글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무성애자들은 매력적인 이성을 봐도 아름다운 미술품이나 노을을 보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아마 무성애자가 아닌 사람의 이해를 위해 저런 식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겠지?


 하지만 어디에도 무성애자의 입장에서 본 유성애자의 감정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난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해 봤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알기도 전에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분명 얻은 것도 있었지만 어떤 반응들 때문에 큰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다. 애초에 출발점이 달라서 무성애적인 입장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걸까?



 무성애라는 개념을 알기 전에도 난 내가 사랑-연애감정-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때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던 게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생각하던 느낌에 가까운 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있었다.

바로 "demi-sexual (반半유성애자 혹은 반무성애자)".

난 내가 생각하던 일반적인 사람을 성소수자로 분류한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이었다.


 절대다수라는 유성애자들은 대체 어떤 감정을 가진 사람들일까? 솔직히 그들이 어떤 느낌으로 사람을 보고 느끼는지 상상이 안 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들이 무성애자의 마음을 상상조차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끝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계속 생각하고 살펴야 하는 기나긴 이야기.

 이런저런 생각으로 몇 날 며칠을 고심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뭐 아무려면 어때?"


 정체성에 대해 결론짓기 전에 난 어느새 그것을 확실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느끼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현실도피가 아닌 극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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